며칠 전 소설 '봉순이 언니'를 읽었다.
책소개 프로에 소개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힌 책인데, 삐뚤어진 성격 때문인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을 때에는 관심이 없다가 며칠 전 책꽂이에 꽂혀 있길래 손에 들었다.
소설의 내용은 어린 짱아의 눈에 비친 희망이 없지만 희망을 놓치 않았던 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였다.
소설을 읽는 내내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보고싶은 정희 언니.
소설 속 짱아에게는 봉순이 언니가 있었지만, 어린 시절의 나, 짱아(짱아는 내 이름에서 파생된 어린 시절부터의 별명이다)에게는 정희 언니가 있었다.
정희 언니는 맹인인 큰이모댁에서 일을 도와주는(그 시절엔 식모라고 했다) 언니였다.
언니가 언제부터 큰이모댁에 있었는지는 모른다.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시절부터 큰이모댁가 있었고 나와는 10살 정도 나이차가 났으니 아마도 아주 어린 나이에 큰이모댁으로 왔었던 것 같다.
앞을 못보는 큰이모는 정희 언니를 큰딸처럼 생각했고, 정희 언니는 그런 큰이모에게 눈을 대신하는 존재였다.
나와 내 동생들은 정희 언니를 친 언니 이상으로 따랐었다.
우리와는 다른 처지라는 것을 알기에 심술궂게 언니를 약올릴 때도 있었지만 언니는 우리 모두의 대장이었다.
씩씩한 성격과 목소리로 우리가 아무리 못살게 해도 항상 웃는 얼굴이었고,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보살펴주었다.
영화를 보러 갈 때에도 스케이트를 타러 갈 때에도 캠핑을 갈 때에도 여름성경학교에 갈 때에도 정희 언니는 항상 우리와 함께였다.
언니가 결혼해서 강원도로 떠나기 전까지 우리는 언니와 함께인 어린 시절을 보냈었다.
소설 속 짱아의 엄마가 봉순이 언니에게 좋은 사람한테 시집보내주겠다고 했던 것처럼 우리 큰이모도 정희 언니의 혼기가 차자 적당한 배필을 수소문했다.
그래서 정희 언니에게 부족하지도 넘치지지도 않는 착한 남자를 소개시켰고, 언니는 어느날 그 남자와 결혼해서 우리 곁을 떠났다.
언니와 결혼한 아저씨는 농부였고, 소설 속 봉순이 언니가 만났던 남자들과는 달리 성실하고 건강한 사람이었다.
언니가 떠난 후 난 언니를 한번도 만나지 못했지만 큰이모와 우리 엄마는 매년 언니를 만나러 강원도에 내려갔고, 가을이면 언니는 고추며 옥수수며를 챙겨서 서울로 보냈다.
언니가 딸을 낳았다는 소식을 듣고 일 년 정도가 지난 후,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보니 언니가 우리집 안방에 누워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무조건 끌어안았는데 언니의 모습이 예전과 달랐다.
감기 한번 알 걸렸었던 언니었는데, 나를 안아주는 팔에 힘이 없었고 얼굴도 창백했다.
그리고 잘 지냈냐는 말을 하는데 목소리가 이상했다.
이상한 마음에 저녁을 준비하는 엄마에게 가서 정희 언니가 아프냐고 물었는데 엄마는 눈물만 보이셨다.
조금 있다 차려진 저녁 상에는 멀건 죽과 계란찜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
엄마는 이거라도 넘겨보라고 하시는데 정희 언니는 웃기만 할 뿐 잘 먹지도 못했다.
다음 날 정희 언니가 돌아가고 나서야 난 엄마에게 정희 언니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언니는 후두암 말기였다.
서울 큰병원에 진료받기 위해 올라온 것인데, 병원에서 2달 정도의 시간만을 선고받았다는 것이다.
처음 이야기를 듣고는 놀랐지만 믿어지지는 않았다.
그렇게 건강했던 언니가 2달 후면 우리를 떠날 수도 있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결혼한 지 몇 년 되지도 않았고, 딸도 이제 돌밖에 안되었는데.
그런데 2달 후 언니는 떠났다.
힘들었던 이 세상에 대한 미련을 모두 남기고 편한 세상으로 떠났다.
아이를 두고 가는 마음에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을텐데 그렇게 가버렸다.
보고싶은 정희 언니.
난 요즘도 계란찜을 보면 내가 마지막으로 봤던 정희 언니 모습이 떠오른다.
그거라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았다면 좋았을텐데.
부드러운 계란찜이 목으로 넘어갈 때마다 울컥울컥 걸리는 것은 아마도 정희 언니를 보고싶어하는 마음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