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개수다

포기할 수 없는 내 인생이기에

바람 행짱 2003. 10. 27. 08:53


얼마 전 텔레비전을 통해 울트라 마라톤이라는 스포츠를 처음 알게 되었다.
일반 마라톤이 42.195km를 달리는 것에 비해 울트라 마라톤은 100km 이상을 규정된 시간 내에 달리는 마라톤을 뜻한다.
달리는 거리만 봐도 아무나 도전할 수 없는 스포츠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내가 텔레비전에서 본 울트라 마라톤은 지난 추석 연휴에 벌어진 한반도 종단 울트라 마라톤 대회였다.
이 대회는 매년 추석 연휴에 열린다고 하는데 강화도의 한 포구에서 출발하여 72시간 내에 311km를 달려 강릉 경포대 앞 바다에 도착해야 완주로 인정되며, 경기 기간 중 잠과 식사는 마라토너들이 각자 해결하는 것이 경기 규칙이었다.
무모한 도전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는 이 마라톤에 참가한 마라토너는 모두 45명이었고, 대부분 40대에서 60대에 이르는 연령층이었다.
나같은 사람은 도전할 엄두도 못내는 힘든 경기를 젊은 사람도 아닌 중년의 아저씨들이 도전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72시간은 짧은 시간이었고, 311km는 먼 거리였다.
5분씩 10분씩 토막 잠을 자거나 한번 눈을 붙이면 일어나지 못할까봐 그 짧은 잠도 청하지 못하고 마라토너들은 계속 달렸다.
추석이라 문을 연 식당이 없어 주린 배를 움켜쥐고 계속 달렸다.
달리다 무릎을 다치고 허리를 다쳐도 계속 달렸다.
강원도 고개를 넘을 즈음 찾아온 태풍 매미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비를 뿌리고 거센 바람으로 몸을 흔들어도 계속 달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부상자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부상으로 인해 중도에서 눈물을 머금고 경기를 포기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걷기조차 힘든 상황인데도 도전을 계속 하는 사람도 있었다.
허리를 다쳐 몸을 90도로 숙이고 삐딱한 자세로 천천히 걸음을 떼어놓는 50대 아저씨에게 물었다.
이렇게 달리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제 인생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어요. 무엇이 문제였나, 나는 왜 이런 결과밖에 얻지 못한 것인가."
무모하게 마저 느껴지는 아저씨의 도전을 보면서 삶에 대한 아저씨의 진지한 자세를 볼 수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당신의 소중한 인생을 보듬고 살아가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볼 수 있었다.

마라톤 같은 극한 상황은 아니지만 나도 산에 오를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한다.
고3 때 앓았던 허리 디스크로 인해 난 한동안 누워서만 생활을 해야 했고, 그로 인해 다리가 많이 약해졌었다.
그래서 등산은 꿈도 꾸지 못할 운동이었는데 언젠가부터 산에 오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20대 후반 우연한 기회에 산을 오르게 되었고, 지금은 사내 등산 동호회 회장을 맡고 있지만 난 여전히 산에 오르는 것이 힘든다.
내 체력을 생각해 무리한 산행은 하지 않지만 산에 오를 때면 언제나 죽을 것 같이 숨이 막히고 다리가 아프다.
그럴 때면 다시 내려가 버릴까 하는 유혹이 날 괴롭힌다.
그러나 그 때마다 난 이 정도 산을 오르는 것을 포기한다면 내 인생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고 천천히 산을 오른다.
히말라야도 알프스도 아닌 조그마한 산조차도 힘들다고 오르길 포기한다면 내 인생의 항해를 진두지휘하는 선장의 자격이 내게 없다는 채찍을 나에게 가하는 것이다.
그리고 산정상에 오르면 그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좋다.
해냈다는 기쁨과 해낼 수 있다는 희망이 가슴 가득 차 오르는 것이다.

올해 울트라 마라톤 대회는 태풍 매미로 인해 대관령 휴게소에 규정 시간 안에 도착하면 완주로 인정해주는 것으로 대회 도중 계획이 수정되었다.
허리를 다친 그 아저씨는 힘든 걸음에 걸음을 보태 결국 완주하셨다.
대관령 휴게소에 도착하신 후에 여전히 허리를 못 펴면서도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하였다.
아마도 아저씨는 마라톤 완주와 함께 희망을 부상을 받으셨을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아직 피로가 덜 가신 얼굴로 아저씨는 말씀하였다.
"도전은 필요한 거예요. 그러나 준비된 도전이어야만 하죠. 제가 이번에 한 도전은 무모한 도전이었던 것 같아요. 충분한 준비 없이 도전해서 오히려 건강을 더 상하게 한 것 같아요."

도전은 아름답다.
그리고 도전을 위한 준비 과정은 더욱 아름답다.
나에게는 주어진 삶의 시간을 준비하고 도전해야 할 의무가 있다.
도전은 성공으로 끝날 수도 있고, 실패로 끝날 수도 있다.
도전의 결과와 관계없이 준비하고 도전하는 그 과정만으로도 삶은 아름다울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울트라 마라톤에 도전한 분들을 보며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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