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개수다

'모든'과 '어떤'

바람 행짱 2004. 9. 23. 20:56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처음 수학 교과서를 펴면 익숙한 집합 단원 다음에 생소한 명제라는 단원이 나온다.
명제란 참과 거짓을 판별할 수 있는 식이나 문장을 뜻하는데, 이 명제라는 녀석 중에서 '모든'과 '어떤'이란 조건이 붙는 녀석들이 있어 학생들에게는 꽤나 까다로운 존재이다.
'2+5<4'와 같은 명제는 거짓이라고 쉽게 판별할 수 있는데 '모든 x에 대하여 x²+x+1>0'과 같이 '모든' 또는 '어떤'이 붙으면 그 참, 거짓의 판별이 쉽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모든'이란 조건이 있는 명제는 하나의 예외도 없이 모두 만족해야만 참인 명제가 되고, '어떤'이란 조건이 있는 명제는 하나 이상만 만족하면 참인 명제가 된다.
따라서 참, 거짓을 판별하기 위해서 '모든'이란 조건이 붙은 명제는 거짓이 되는 예(반례)를 찾고, '어떤'이란 조건이 붙은 명제는 참이 되는 예를 찾는다.
예를 들어 명제 '모든 x에 대하여 x²+2x+1=0'은 'x=2'가 반례이므로 거짓인 명제이고, 명제 '어떤 x에 대하여 x²+2x+1=0'은 'x=1'일 때 주어진 식이 성립하므로 참인 명제이다. 

 

명제를 사람에 비유하자면 '모든'은 하나의 예외도 없이 모두 명제를 만족시켜야만 하고 참인 예를 찾기 보다 거짓이 되는 반례를 찾기 때문에 빈틈이 전혀 없고 부정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 같다.
그에 반해 '어떤'은 참이 되기 위한 한 가지를 예만 찾으면 되니 여유롭고 긍정적인 성격의 사람 같다.
그래서 나는 '모든'이란 명제보다 '어떤'이란 명제가 좋다.

 

우리의 삶 속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상황이나 좋고 싫음을 판단하는 상황도 따지고 보면 참, 거짓을 판별하는 명제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우리가 맞닥뜨리는 상황에서 명제 앞에 '모든'을 붙이냐, '어떤'을 붙이냐에 따라 참, 거짓의 결과는 달라진다.
어떤 사람이 영화 한 편을 본 후 그래픽이 띠가 난다든지, 분장이 어색했다는지 하는 마음에 흡족하지 않았던 몇 가지에 주목하게 되면 그 영화는 돈 아까운 영화가 되는 것이고, 공감하는 한 가지를 얻고 그것에 만족하면 그 영화는 기억에 남는 영화가 된다.
이런 상황들을 꼼꼼히 따져보면 우린 대부분 '모든'이란 조건을 전제하고 그것으로 참, 거짓을 판단한다.
모든 것이 완벽해야 하고, 단 하나의 예외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만 참이면 전체가 참이 되는 '어떤'의 행복이 바로 곁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눈이 예쁘고 코가 못생긴 여자가 '모든'이란 조건을 달면 추녀가 되지만 '어떤'이란 조건을 달면 미녀가 된다.
어차피 같은 얼굴이라면 추녀라는 생각보다는 미녀라는 생각으로 사는 것이 조금 더 행복하지 않을까?
지금보다 조금 더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모든'의 구속에서 벗어나 '어떤'으로도 만족하는 여유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