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잔상

[제주도] 사려니숲 - 숲의 품에 폭 안기다

바람 행짱 2013. 8. 21. 18:32

제주 여행 넷째 날, 계획대로라면 올레를 걸어야 했다.

하지만 전날 숙소에서 본 '사려니숲 힐링 에코' 팜플릿 때문에 계획을 바꿔 사려니숲으로 향했다. 

사려니숲은 평소에는 숲 보호를 위해 일부 구간만 개방하는데 일 년에 단 일주일만 전 구간을 개방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니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그래서 지도를 보고 붉은오름 입구에서 시작하여 전나무 숲을 거쳐 사려니오름으로 나오는 것으로 계획을 잡고 길을 나섰다.

그러나 문제는 18km 이상의 거리를 걸어야 하는데 나에게 먹을 것이라고는 물 반병뿐이라는 것이었다.

숙소부터 붉은오름 입구까지 가게 비슷한 것도 찾을 수 없어 아무것도 준비할 수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다이어트 하는 셈 치자고 시작한 걷기는 어느 순간 허기에 허리가 꼬부라지는 고행길이 되기 시작하였으나, 우연히 만난 아저씨와 아주머니에게 김밥 5알과 오이 반 개를 얻어먹고 겨우 허기만 면했다.

숲을 걸으면서 사람을 만난 것은 초입뿐이었고, 폐쇄되었다 개방된 구간에서는 나를 피해 도망가는 뱀 몇 마리 만나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전나무 숲에 들어서서 이분들을 만난 것은 하늘의 도움이었다.

 

   5월의 숲은 녹색의 향연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 나무 사이로 들어서면 비밀의 정원이 나올 것 같다.

   곧게 뻗은 나무들이 하늘을 가려 숲은 은밀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초입에 있는 붉은 오름에 올라서니 제주의 풍경이 펼쳐진다.

 

   여린 잎파리 무리는 새가 종종거리며 걸어간 발자취 같다.

   큰 나무와 작은 나무가 이렇게 함께 땅을 공유하고 있다.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계곡은 맑디 맑다.

   잠시 물소리를 들으며 머물러 본다.

   '아, 간지러워.' 나무의 속삭임이 들리는 듯하다.

   잎일까? 꽃일까?

   삼나무 숲에 들어서자 거대한 병정들이 기립하며 예를 표한다.

   삼나무 사이로 난 데크를 걸으며 숲의 향을 내 안 깊숙히 담는다.

   삼나무는 재크의 콩나무처럼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간다.

   작은 돌무더기가 사람의 모습으로 앉아 세상을 본다.

   삼나무 그늘 속에서 노란 꽃을 피운 란이 수줍은듯 고개를 숙이고 있다.

   먹으면 죽어서 남쪽 하늘의 별이 된다는 뜻을 가진 천남성이라는 독초도 이 숲의 일원이다. 

   몸뚱이를 내주고 밑둥만 남은 나무가 파란 이끼 옷을 입었다.

   이끼도 하늘이 그리운지 나무를 오르고 또 오른다.

   여기 저기 신기한 풀이 많아 걷는 즐거움에 보는 즐거움이 더해진다.

   꽃 융단이 깔린 계단을 올라 사려니오름에 오른다.

   나무와 한몸인듯한 콩란이 싱그럽다.

   숲이 우거진 사려니오름에서 시야가 탁 트이는 곳은 오직 이곳뿐이다.

   안개가 덮인 풍경은 아련하다.

   긴 시간 동안 숲의 품에 폭 안겼더니 내 몸에도 숲 내음이 배인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