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개수다

엄마 아빠는 비행 중

바람 행짱 2003. 10. 7. 14:11

우리 집은 딸만 셋이다.
그 중 나는 첫째이고.
아빠가 맏이이다 보니 어려서부터 할아버지의 아들 타령이 심했다.
할아버지가 이러시다 보니 엄마도 힘이 많이 들었고, 아들을 낳겠다는 생각에 셋째를 낳았지만 셋째마저 딸이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데 엄마는 막내 동생을 낳고 딸이라는 사실을 안 후 대성통곡하셨다.
그런 엄마를 위로하신다고 아빠가 엄마에게 텔레비전을 선물하여 철모르는 나는 그저 좋기만 했었는데 엄마는 그 비싼 텔레비전에도 반응을 보이지 않으셨다.
할아버지의 아들 타령이 얼마나 심각한 것이고 그것으로 인해 엄마가 받는 상처가 얼마나 큰 지 모르다가 조금씩 나이가 들면서 알게 되었고, 그 사실을 알게 되면서 내가 딸이라는 사실이 싫어졌다.
그래서 어는 순간 긴 머리를 잘라달라고 엄마에게 떼를 썼고, 다시는 머리 기른다는 말을 하지 않기로 약속한 후 남자아이처럼 커트를 쳤다.
그리고 엄마가 힘들게 동대문 시장까지 가서 골라오신 예쁜 옷들도 입지 않겠다고 하고 바지만 사달라고 졸라댔다.
그렇게 머리를 자리고 바지만 입는다고 해서 내가 아들이 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러나 내가 어린 시절만 해도 '남아선호'가 투철한 시대였고, 그나마 '남존여비'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감사해야 할 정도였다.

그 시절 그렇게 아들을 선호했던 것은 미래에 대한 보험 같은 것이 아니었나 싶다.
아들은 키워놓으면 부모님 모시며 살지만 딸은 남의 식구 되 버리면 그만 이라는 생각이 무조건 아들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굳어지게 된 것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아무튼 엄마 아빠가 아무리 아이들 계속 낳는다 해도 팔자에 없는 아들이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결국 내가 엄마 아빠에게 아들 노릇을 해야 한다는 결심을 한 것이 8살 때였다.
그런 결심을 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엄마가 아들을 못 낳는 것을 타박하는 할아버지의 편지를 우연히 보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 난 울면서 결심했다.
내가 진짜 아들보다 더 좋은 아들이 되어서 엄마 아빠를 모시겠다고.
아들 낳으면 기차 타고 부산 간다는데 난 엄마 아빠 꼭 비행기 태워드리겠다고.

그리고 30년 가까이 세월이 흘렀지만 난 그리 좋은 딸이 되지 못하고 있다.
엄마의 소원이라는 결혼은 아예 염두에 두지도 않고 있으며 늘 일과 시간에 쫓겨 부모님을 위한 시간을 그리 많이 내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 때의 아들이 되겠다는 오기만은 남아 있고, 비행기 태워드리겠다는 약속은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25살이 되던 해에 부모님 금혼식을 맞아 처음 비행기를 태워드렸고, 지금은 엄마 환갑을 맞아 두 분이 유럽을 여행 중이시다.
물론 부모님을 섬기는 것에 금전적인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가 어렸을 적 이 악물고 결심했던 것을 실천에 옮겼고, 부모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에 그저 뿌듯할 뿐이다.

요즘엔 늘 기도한다.
부모님이 오래 내게 곁에 머무셔서 내게 기회를 많이 주실 수 있게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