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들아, 우리는 어차피 최약체니까 그냥 살살하자. 넘들 이기라고 해. 공을 받으려고 하지 말고 그냥 도망만 다녀. 알았지?"
회사 위크숍 오후 프로그램이었던 체육대회에서 내가 우리 부서 아이들에게 당부한 말이다.
우리 회사 체육대회의 하이라이트는 여자들만 참가하는 피구이고, 피구 하면 입에 오르내리는 몇몇 사람들이 있어서 처음부터 그녀들을 이길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내 작전 지시를 받은 야리야리한 우리 부서 아가씨들은 대타만 있으면 경기에서 빠지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을 얼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내며 공수를 나누어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웬걸...
막상 게임이 시작되고 나니 내 머릿속엔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생각만 가득 차는 것이 아닌가?
상대편 선수가 공을 맞으면
"너 죽었잖아? 빨리 나가!"
라고 덮어놓고 소리지르고, 우리 편이 선수가 공을 맞으면
"그거 땅볼 아니야?"
라고 억지를 부렸다.
이런 나에게 서서히 물들기 시작한 우리 부서 아이들까지 흥이 나서 게임을 하다보니 우리는 어느새 우승 팀이 되어 있었다.
반란에 가까웠던 피구를 끝내고 축구를 시작할 때, 다시 제정신이 돌아온 나는 여자들에게 질 수 없다고 잔뜩 긴장한 남자들에게
"우리만 계속 이기면 재미 없잖아. 살살 해."
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경기가 시작되니 상황은 또 급변했다.
목소리가 갈라지도록 응원하다가 무승부라 승부차기까지 가게 되자 마지막 키커로 나서 네트에 꽂히는 골을 넣고는 뛸 듯이 좋아했다.
다음 날 경포대 바닷가에서 벌어진 줄다리기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연출됐다.
"얘들아, 기운 없다. 정말 살살하자. 덩치를 보니 우리가 이길 수가 없겠다."
라고 했지만 막상 줄을 잡고나서는
"절대 끌려가면 안돼. 끌려갈 것 같으면 뒤로 누워 버려."
라고 작전 지시를 내렸다.
내 작전 지시에 고무된 아이들은 젖먹던 힘까지 동원해 줄을 당겼고 우리는 또 이겼다.
환호성을 지르는 가운데 한 녀석이
"우리 이게 뭐야? 맨날 살살 하자고 하고서는 경기만 시작되면 미친듯이 매달리잖아."
라고 하자 모두 맞장구를 치며 크게 웃었다.
어렸을 때 나에게 승부욕은 없었다.
공부도 친구들과의 상대 평가가 아닌 나 자신만의 절대 평가를 했기에 누군가를 상대로 한 승부욕 따위는 없었다.
그런데 사회 생활을 시작하면서 승부욕이 과도하게 생기기 시작했다.
사람을 배경으로 평가하고, 결과에 대한 평가가 공정하지 않은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달라져야 했다.
작은 일으든 큰 일이든 다 해내야 했고, 남들보다 잘해야 했다.
그래서 조건 반사처럼 환경에 의해 내 안에 내재되버린 승부욕이 이제 어떤 일에서건 무의식 중에 발동을 하는 것이다.
그야 말로 몹쓸 승부욕이.
이제 이 승부욕에서 자유로워지고 싶다.
어떤 상황이든 어떤 결과든 즐길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찾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어찌 하누?
승부욕을 꽃피워 얻은 결정의 결과가 달콤함을 알아버렸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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