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할아버지의 기제사날이다.
언제나 제사 준비는 맏며느리인 엄마의 몫이다.
작은 엄마도 고모들도 도와주지 않는다.
그래서 휴가를 내고 아침부터 지금까지 전을 부쳤다.
휴가를 낼 상황이 아니었는데 혼자 애쓰시는 엄마에게 미안해서 휴가를 냈더니 엄마가 좋아하신다.
생전의 할아버지는 아주 괴팍하신 분이었다.
항상 모든 사고는 당신이 기준이었고, 가족 부양의 책임도 지지 않으셨으며, 멋드러진 인생만 꿈꾸는 한량이셨다.
난 8살 때 할아버지가 내 부모님에게 참 힘든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할아버지는 늘 아빠에게 뭔가를 요구하셨고, 그것을 해주는 것이 자식된 도리라고 하셨었다.
아들을 못낳은 엄마에 대한 구박도 심했다.
이런 할아버지는 엄마 아빠에게 뿐만 아니라 할머니, 고모, 삼촌에게도 힘든 존재였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늘 혼자였다.
모두 할어버지를 마주 대하는 것을 싫어했고, 할아버지의 존재 자체를 무시할 수만 있다면 무시한채로 살고 싶어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아예 생각조차 안 하셨다.
어렸을 때는 멋지기만 한 할아버지를 무척이나 좋아했었는데 8살 이후부터 난 할아버지가 싫어지기 시작했다.
사춘기가 시작되고는 그 정도가 더 심해져서 같이 살아도 할아버지에게는 말도 건네지 않았고, 인사를 해도 머리난 꾸벅 숙일 뿐이었다.
할아버지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도 싫었고, 할어버지랑 같이 안 살기만을 바랬다.
심지어는 할아버지 때문에 엄마 아빠를 힘들어 하는 것을 볼 때면 할아버지가 빨리 돌아가셨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하였다.
그러던 할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암진단을 받으셨고, 진단을 받으신지 2달만에 돌아가셨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엄마, 아빠의 간호는 극진했다.
할아버지로 인해 가장 많이 다치시고 아파하셨던 분들임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정성을 다하셨다.
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 난 단 한 번 할아버지를 찾아뵈었다.
늘 멋쟁이셨던 할아버지가 병자의 모습으로 누워계시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많이 아팠다.
할아버지는 마지막 가시는 길에 엄마, 아빠에게 미안하다는 말씀을 남기셨다.
난 할아버지가 편하게 가신 것은 할아버지가 엄마, 아빠에게 마지막으로 남기신 선물이라고 믿고 있다.
할아버지의 빈소에서 난 이틀을 꼬박 울었다.
그렇진 않겠지만 오래된 내 나쁜 마음 때문에 돌아가신 것 같아서, 마지막 가시는 길까지 내 마음의 미움을 버리지 못했던 것이 미안해서 울고 또 울었다.
그렇게 멋쟁이셨던 할아버지였는데 영정 속에 할아버지의 얼굴은 너무 슬퍼보였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지 이제 만 육년이 되었다.
명절이나 할아버지 기제사 때가 되면 난 할아버지의 빈 자리를 느낀다.
이제는 한 줌 흙이 되셨을 할아버지의 자리가 너무 컸음을 느낀다.
세월이 흐르면 내가 받은 것보다 내가 준 것이 무엇인지만 남는 것 같다.
돌이켜보면 할아버지는 맏손녀인 날 늘 이뻐하셨는데 난 할아버지에게 해드린 게 아무것도 없다.
할아버지의 빈소에서 후회의 눈물을 흘린 것이 전부이다.
이제 몇 시간 후면 제사상이 차려지고 가족들이 둘러 앉을 것이다.
보이지는 않지만 할아버지도 오셔서 생전에 좋아하셨던 엄마가 만든 음식을 맛있게 드실 것이라고 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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