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개수다

기차 안에서

바람 행짱 2016. 7. 23. 18:34


아침 기차를 타고 대구로 내려가는 중이었다.
좁은 자리에서 등받이에 등을 댄 상태에서 책을 들고 읽는 자세가 불편해서, 식판 위에 올려놓고 상체를 앞으로 숙인 채 책을 읽고 있었다.
대전을 지났을 때쯤 커피 판매원이 지나가자, 옆좌석의 남자분이 커피 한 잔 드시겠냐고 물었다.
앉아 있던 자세 그대로 눈도 마주치지 않고 "아닙니다. 괜찮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다시 책을 읽었는데 두 잔의 커피를 구입한 그 사람은 내게  커피를 내밀며 "한 잔 드세요."하는 게 아닌가.

형식적으로 건넨 말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커피를 건네니 성의 없이 대답한 내 태도가 미안했다.
그렇지만 이번에도 앉아 있던 자세 그대로 내 좌석 식판에 올려진 커피에 눈길을 고정한 채 인사만 했다.
"고맙습니다. 잘 마시겠습니다."
그 사람의 목적지도 대구였나 보다.

도착 안내 방송이 나오자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출구로 향하는 뒷모습에 대고 나는 성급히 인사를 하였다.
"안녕히 가세요."

기차 옆자리에 앉게 되는 인연이 특별하다면 특별할 수 있겠지만, 휘발되어 사라지는 인연이다.

하지만 오늘은 커피 한 잔으로 따뜻한 인연으로 기억되었다.


대구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아침에 읽던 책을 읽는데, 우연히도 이런 글이 있었다.
인간의 기억은 단기 기억과 장기 기억으로 나뉘는데, 단기 기억은 불과 18초 만에 뇌에서 삭제된다고 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대부분 단기 기억이고, 그것이 장기 기억으로 저장되기 위해서는 동기가 있거나 반복적인 되새김이 필요하단다.

이 내용을 오늘 아침 기차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를 대입해 보니, 옆자리에 앉은 인연은 기차에서 내리면 잊혀질 단기 기억이었으나 따뜻한 커피 한 잔으로 장기 기억으로 저장된 셈이다.


기차와 커피에서 따뜻한 인연으로, 책을 읽으며 장기 기억으로.

여러 가지가 연이어 엮이면서 생각이 재밌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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